강서구 문화재1 소개
안녕하세요.
강서구호빠입니다.
오늘은 강서구호빠와 함께 강서구 문화재중 양천고성지, 김덕원묘 출토의복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서구 문화재1
강서구에는 국가지정문화제 7개(보물5/사적1/등록문화제1)와 서울시 지정문화재 8개(유형문화재4, 시기념물2, 무형문화재1, 문화재자료1)로 총 15개가 있으며, 전통사찰, 정자 등 많은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전통 있는 도시입니다.
양천고성지
| 지정번호 | 사적 제 372호 |
|---|---|
| 지정일자 | 1992년 3월 10일 |
| 관리자 | 강서구청장 |
| 시대 | 삼국시대 |
한강 하구를 지키던 군사요새
조선 시대에 양천은 한강과 육로를 통해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는 최후의 저지선 역할을 담당했던 수륙 양면으로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지리적으로 소읍이었지만 현감보다 높은 직급의 현령을 두어 관리하게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해발 74m의 궁산에는 성벽을 쌓았던 흔적으로 적심석과 성의 돌이 남아 있다.
양천고성지(陽川古城地)는 삼국 시대 이래로 행주산성(사적 56호),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351호) 등과 더불어 한강 하구를 지키던 중요한 군사요새였다. 이곳은 가양동 ‘양천향교지’ 뒤편인 궁산에 위치한 넓이가 약 29,370m2의 옛 성터로서 『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 문헌 자료에 등장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도 석성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양천향교의 뒤편인 성산(지금의 궁산)에 고성(古城)이 있는데 그 둘레는 726척 (약 218m)이고 지금은 성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조선 중종(1531년) 때는 이미 폐성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략 축성된 시기는 삼국 시대로 추정된다. 서울시와 강서구에서 2008년부터 발굴을 시작하여 3차 발굴 때, 석축 13층의 성벽과 유물이 발견되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임진왜란(1592년) 당시에 권율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전라 소모사 변이중 장군, 강화 의병장 우성전 장군 등이 의병을 이끌고 이 성에 유진했다가 한강을 건너 행주대첩에 참가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군이 주둔했다. 6.25 사변 때는 미군과 국군이 차례로 주둔함으로써 산 정상은 심하게 변형되어 있다. 그러나 1994년에는 산 정상 동편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소악루(小岳樓)가 아름답게 복원되어 강서 구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김덕원묘 출토의복
| 지정번호 | 보물 제672호 |
|---|---|
| 지정일자 | 1980년 8월 23일 |
| 관리자 | – |
| 시대 | 조선시대 |
조선 중기 상류사회 복식 연구의 귀중한 자료
김덕원공은 조선 현종 3년인 1662년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출발하여 사헌부지평, 경상감사, 대사간,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두루 거쳐 1689년에 우의정을 지냈다. 그는 폐비 민씨복위운동을 반대하여 제주에 유배되었다. 1698년에는 해남에 이배되었다가 1699년에 풀려났다. 711년에는 신원되었다.
김덕원공(1634~1704년)과 그의 부인 합장묘는 1972년에 발굴되었다. 그 안에서 비단의복, 구름 문양이나 꽃문양을 넣은 단로 등 53종 68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보존 상태가 모두 양호하여 우리나라 조선 중기 상류사회의 복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출토된 의복은 거의 전부 견(絹)으로 만든 것이며 운문(雲紋)이나 화문(花紋)을 넣어서 짠 단류(緞類)도 적지 않다. 그 종류로는 다음과 같다. 운문단관복표리(雲紋緞冠服表裏), 운문단천익(雲紋緞天翼)을 비롯하여 명주로 짠 청의 9점, 운문단, 공단 등으로 짠 직령포 7점, 공단, 운문단, 화문단, 명주 등의 이불 5채와 토수(吐手), 중치막(中致莫), 저고리, 바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17세기 조선 시대의 복식을 연구하는 경우 아주 중대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남녀 의복은 동시에 다수가 출토되어 하나의 뚜렷한 통계치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괄목할 만하다.
출처 강서구청
강서구 문화재1 소개 끝

